추억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먼훗날 그때
그리운 장면으로
기억되어지는 것
그것이 추억일거야.
애써 외면하던
너의 얼굴이
자꾸만 떠 올라...
생각해보니
추억이 될 오늘을
그때 이미 만들었던거지...
2011.10.28 04:47 기억 머깨비의 싸이홈피 [그날일기]중에서
그동안 시나 음악을 포스팅 하면서 항상 포토샵을 이용하여
시나 음악에 맞는 이미지를 하나씩 혹은 그 이상을 직접 만들어서
함께 담아왔는데...내게 있어 포토샵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파란만장한일들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그 어떤 희망조차 품을 수도,
품어 볼 수도 없을만큼 삶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것이 포토샵이었습니다
2004년과 5년은...
조그맣게 하던 그림 사업이 잘못 되는 바람에
단 한순간에 신용불량자로 추락해 버린 정말
버티기가 너무나 힘겨웠던 시기였습니다.
가정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모든 것에서...
눈을 뜨면 천정이었고,
몇일이 지났는지,어제 밥은 먹었는지...
다시 눈을 감으면 또 몇 일이 지났는지...
줄것 주고,갚을 것 다 갚고나니 수중에는 180만원 정도가
다행히 남아 주었더군요.(카드 회사빚 제외)
내가 돈 못받아서 망했으면 직원들 월급이라도
조금 미뤘으면 그토록이나 처절한 생활은
비켜 갈 수가 있었을텐데...
또 그런쪽으로는 우직할 정도로 완고해서
카드깡까지 해서 해결하고 나니 그리 되더군요.
180남은 것 중에서 50 보증금에 월세 15만원짜리 방을
봉천고개 밑 달동네에 구했는데...
짐이 많았기 때문에
허름한 창고라도 필요했었지요.
주변머리가 그쪽으로는 또 꽉꽉 막혀있던 탓에
어디가서 단돈 10만원도 융통할 엄두도 못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정말 신기한 것은....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스스로가 비참하다고
여겨 진다거나 비관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난 그동안 인정받고 잘 해 온 일이 있으니까,
한 두달만 고생하다보면
다시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그 생활도 금방 면할것으로 믿었으니까요...
하지만,몇군데 철석같이 믿었던 회사를 찾아가서 캔슬 맡고,
자존심까지 밑바닥으로 추락해 버리고 나니
그때부터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은
사람의 심경이 어떤 것인지 알겠더군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어디에선가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신림 4거리에 나갔다가
전철역 계단에서
강아지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한테
하얀색 아메리칸 코카 스파니엘을 한 마리 샀는데...
동물농장 정말 문제가 많습니다.
사회의 여러가지 크고 작은 이슈에 묻혀 가고 있는데...
동물 농장은 당장 없애 버려야할 사회악이며
생명존중 사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인간이
할짓이 못되는 사악한 자들의 돈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장염이 걸렸다는 것을 사흘 후
근처 동물 병원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어린 강아지들은 생존 확률이 5퍼센트 정도 밖에는
안되는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병원비 40만원을 주고
고치긴 했습니다만,
그 동네에 돌고 있던 홍역에 걸려
발작을 시작한지 십분도 안되어 숨을 거뒀습니다.
불쌍한 아기천사 럭키...
봉천동 달동네...
재개발 계획이 있어서인지 유서깊은 봉천 시장마저도
가게의 90퍼센트 이상이 포장을 쳐 버렸거나
이미 이사를 가버린 아주 을씨년스러운
거리가 되어 있었는데...
시장 입구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사람의 옆에
작은 공간이 바로 내가 얻은 방이었습니다.
말이 방이었지...벽면 네 군데 중에서
두군데는 유리로만 되어 있었고,
유리에는 영안실에서나 사용할 수 있을법한
검정색 커텐으로 유리를 막아 놓은
6평 반짜리 단칸방.
당연히 부엌은 없었고 온돌도 되어 있지 않아
바닥에 전기 보일러를 깔았는데
한 사람이 누울정도의 넓이만큼만
그마저도 보일러선이
깔려 있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정말 미치겠는건 시장 끝 모퉁이다보니
쓰레기를 유리벽 앞에 무단으로 버리는데...
그 음식 쓰레기 냄새는 사람이 미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악취를 뿜어 내었지요.
파리와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그런 비위생적인
쓰레기장 옆에서 살면서도
크게 슬프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현실에서 슬프지 않단 사실이
슬펐을 뿐입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아쉬운건 많았습니다.
시장 입구에 그나마 남아있는
곱창집이 무당집 옆에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다시 직장을 잡아서 돈을 벌면 제일 먼저
저 집에 가서 곱창하고 막걸리를 마시리라...
돈이 궁하니 최소한의 낭만조차도
누릴 수가 없는 현실이 많이
안타깝긴 했을 겁니다.
문을 열면 곧바로 방 전체가 들여다
보이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사용하던
책상 두개를
문앞에 파티션처럼 막아놓고
컴퓨터 두 대를 나란히 올려 놓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밤이면 인터넷에 들어가서
글도 읽고 틈틈히 글을 쓰는 날도 있었지요.
그나마 아기천사 럭키를 보내 놓고도
다행인건 내게 와서 겨우 사흘을 함께하다가
깔아놓은 신문지에 설사만 해대다가 갔으므로
정이 많이 들지는 않아서 그런지
슬픔은 금방 잊을 수가 있었는데...
그 슬픔이 뭉쳤다가 한참후에...
쪼꼬를 또 잃었을 때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것 같습니다.
그나마 남았던 돈도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자
서울역 직업 소개소를 통해서
지방원정 노가다(몸노동?)를 하러 갔는데
거기서도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새벽부터 시작해서 천정판과 벽판을
붙이는 작업이었는데...
인부들의 단체 숙소는 안중의 어느 빌라였습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고,
학창시절에도 자질구레한 아르바이트보다는
주로 현장에서 몸노동으로 용돈을 충당했기 때문에
내게 그다지 뭐 생소하다거나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지고 간 책과 만연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새벽부터 시작해서 저녁 일곱시까지
꼬박 12~13시간 동안이나 몸을 혹사해 놓고도
그 사람들 정말 대단했습니다.
무순 술을 그렇게 퍼 대는지...
그러면서 훌라나 포커를 치는데...
난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글을 썼습니다.
술자리를 계속해서 거절하자 그것이
그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모양 입니다.
어이~~여보슈 차씨~~그럴거면 당장 그만 두슈~!
현장 반장이 도박을 알선하는 이유는
친목을 빙자해서 술값을 인부들로부터
갈취하려는 수법이었는데,
합류를 하지 않으니 소위 말하는
삥을 뜯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지요.
어느날 부턴가 힘든일만 골라
시키기 시작하더군요.
철근을 5층으로 혼자 나르게 한다거나,
60킬로나 나가는 대형 천정판을
혼자 들도록 한다거나...
어느날 참다참다 못해서
소싯적에 주먹꽤나 썼었노라고
툭하면 알통을 까며 주먹의 대부처럼 허풍을 떠는
천정판 기술자(나이가 어렸음)와 팔씨름을 핑게로
팔목을 꺾어서 못쓰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을 시작하고 스무 하루째 되던 날이었을 겁니다.
당연히 숙소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수중에는 돈도 없었지만,
갑자기 발동한 오기 때문인지
안중에서 밤낮으로 걸어
서울까지 고게 되었는데...
난 그제서야 내가 사는 한국땅에
강과 다리가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길을 모르니 당연히 국도를 타고
이정표를 보면서 걸었는데...
한밤중에 과속으로 달리는 차들...
도로는 갓길이 있었으나
다리에는 갓길이 없는곳이 많았습니다.
깜깜한 밤에 운전자에게
눈에 띄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도로 교각은 인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통행이 없다고 믿을것이므로
운전자들이 대부분이 더 과속으로 달리지요.
다리가 길을 막아설 때마다
임시 방편으로 라이타 돌을
주기적으로 태우면서
다리를 건너곤 했습니다.
드디어 서울 입성...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온몸엔
땀에 찌든 케케한 냄새가 풍겼지만,
서울 하늘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인적도 없었던것 같네요.
그로부터 일주일 후 즈음해서 통장에 수당이
직업 소개소를 통해서 입금이 되었습니다.
그 돈으로 이사를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내 사는 꼴이 그 지경이라
고향의 부모님과 형제들과는 연락도 끊고 살았던...
그래서 모든걸 나 혼자 해결해야만 했었던...
그렇게 해서 알아본 곳이 구로동의 어느 공장건물 4층
옥탑방이었는데...그때가 2006년 말이었을 겁니다.
보증금 100에 월 25만원...
옛날 공순이 공돌이들의 애환이 아직 가시지 않은
벌집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고
옥상의 한편 구석에는
시커먼 탄가루가 묻어있는
연탄 창고가 벌집처럼 허름하게 서 있던 곳...
그래도 그곳은 너무 좋았습니다.
비록 버스 종점이 공장건물 뒷켠이다보니
새벽마다 단체로 시동거는 소리에 괴롭긴 했지만,
옥상도 넓었고, 방도 넓었고...
그리고 사람좋은 이웃도 사귈 수가 있었는데...
그 분은 손목사'라는 분이었고, 돈이 없다보니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며 부목사를 했지만,
그걸로는 생활을 유지 할 수가 없었는지
가산역 근처의 이랜드에 아르바이트를
다니던 가난한 목사 였지요.
어느날 남구로쪽에 후배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난히 내 눈길을 사로잡은 녀석이 있었는데...
유리 너머에서 내가 걷는 보폭에 맞춰
시선이 따라오던 사내아이 쪼꼬였습니다.
생후 8개월쯤 되는 아메리칸 코카 스파니엘었는데...
분양이 안되어서 이미 커 버렸고, 그러다보니
더 분양이 힘들어진 강아지였습니다.
그냥 가려다가 자꾸 눈에 밟혀서
가까이에서라도 보고싶어서 애견샵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5만원에 주사값 3만원을 보태서
흥정끝에 지불하고 쪼꼬를 품에 안고
옥탑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전보다는 그래도 사는 환경이 많이 좋아졌으니까...
코카 스파니엘을 키워 보신분들은
내 심정을 아실겁니다.
극성맞지요...비글,슈나유저'에 이어
삼대 지랄견에 포함되는 아주 극성스런 종.................
뭐든 입에 닿는건 다 물어뜯어 망가뜨리기 일쑤인데...
일년후 부터는 좀 나아지기도 하지요.
그 애와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거리에 나가 취업정보지란 정보지는
묵은것 까지 포함해서 한 아름 안고 돌아와
볼펜으로 체크하면서 나에게 맞는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기술로 먹고 살던 사람 그 기술이 아닌
다른 직종을 알아 본다는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겪어보신 분들은 아실겁니다.
밤새 알아 보았는데...
딱 한군데가 눈길이 갔습니다.
"명함 디자인...상담후 결정하겠습니다."
전화를 걸어 알아보니 일러스트'를
다룰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포토샵은 자신이 있었지만,
일러스트는 호기심으로 데스크탑에 깔아놓긴 했지만,
사용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강남 지하철역의
한가람 문고에 가서 일러스트를
가장 싼 책으로 4만 8천원을 주고 사서
밤새 책을 보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면접 보기로 한 날이 사흘 후였으므로
일러스트'에 능한 엔지니어처럼
속이기 위해서는 열심히 해야만 했는데,
포토샵과 큰 차이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호환이 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더군요.
그래도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어느정도는 아는척 하는 수준까지는
약식으로 익혔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은 요즘 꽤 커지고
체인점망까지 형성된 한 프린트 회사였는데,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닥 필요한
회사 같지는 않았습니다.
체인점으로 운영하는 방식이다보니
주문이 들어오는 모든 일들이
기획에 관계된 것들은 본사의 기획실로
일감이 가게 되었는데 ...
그 벌이가 아까와서 명함 디자인 정도는
직접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직원이라고는 삼십대 중반의 사장과
그 밑에 32세의 과장,
그리고 26세 여자 경리가 전부였는데...
그동안도 과장이란 사람이 주먹구구식으로
일러스트를 배워서 명함 디자인을 해왔던것 같더군요.
그런데 페이가 문제였습니다.
사장이 나보다 무려 열살 가까이 연배가 어렸는데...
나 정도 되는 사람의 나이에 줄 수 있는
월급으로는 너무 박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주저주저 하면서
말문을 닫고 열 생각을 못했습니다.
우리네 프린트 사업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영세해서...라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아주 난처해 하더군요.
정말 오랫동안의 침묵이 흘렀고
난 그 시간이 일평생을 다 보탠것만큼의
길고 긴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력서에 모 직종의 감독을 하셨다고 했는데...
저희 한테는 그런 이력은 전혀 필요가...없습니다.
그래도 해 보시겠다면.............
중식 제공에 120 드리고,6개월 후에 다시 페이해서
올려 드릴 용의는 있습니다.
어때요?...해 보시겠습니까?
난 그제서야 긴장이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90만 줘도 할텐데...120씩이나...]
우여곡절 끝에 전혀 새로운 직종에서
새 출발을 하기 시작했지만,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명함 디자인이란것은 비수기와 성수기가 뚜렷해서
명절전이나 조금 주문이 들어오고
그나마 주문이 들어와도
명함 한 건 디자인 하는데 10분이면 끝납니다.
명함은 대체로 기존의 로고나
형식이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텍스트 크기나 위치,
그리고 연락처와 이름 정도만 바뀌지요.
눈치가 보여서 일이 없을때는 복사도 뜨고,
용지도 차에 싣고 내리면서
그렇게 삼개월 정도 눈치밥을 먹으면서
출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사장이란 사람이
굳은 표정으로 물어 보더군요.
차선생님(딱히 부를 호칭은 없지,
나이는 자기보다 열살이나 많지...
그래서 그렇게 부른듯함)
혹시......포토샵도 하실 줄 아십니까?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나의 원래 전공은 일러스트가 아니라 포토샵입니다.
그렇데 대답을 했지만,
사십이 넘은 내 나이 때문인지 왠지 나의 감각을
못미더워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까다로운 회사의 광고인데...
못하셔도 할 수는 없습니다...
포토샵을 아주 잘하는 회사를 알고 있는데...
외주라도 주려고요...
단가가 꽤 괜찮아서 포기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잠시후 주문한 광고의 대충 잡은 아이템 윤곽을 보면서
포토샵을 이용하여 광고 디자인을
뚝딱 마쳐서 가져갔더니...
"그럼 그렇지...
이게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데...
이걸 벌써 해 오다니
이 사람 정말 대책이
안 서는 사람이구나..."하는 눈치
그러나 잠시후...
대기업 바이저와 사장실에서 모니터를 쳐다보면서
수군대는것이 보이더니
내 쪽을 둘이서 번갈아가면
쳐다보는 거 있죠.
그날 퇴근전에 사장실에 불려 갔더니
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하더군요.
120 임시직에서 440에 사대보험까지...
파격적인 업그레이드였지요.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서 공사장이 말하더군요
그 금액이면 자신이 버는것보다 훨씬 많다고...
아마 거짓은 아니었을 겁니다.
프린트 하는 조그만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
벌어 들일 수 있는 돈은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이후 사장은 포토샵을
필요로 하는 일도 함께 받아오기 시작했고
카드빛도 조금씩 갚아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모 국내기획일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고
5년만에 원래의 직업으로 복귀 했습니다.
그 회사는 아직 총감독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들간에 암투가 심해서 처음 몇 달 동안은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난 총감독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예전의 관록이 있어서인지
엄청 경계하더군요.
그런 와중에 시름 시름 앓던 쪼꼬를
서울 수의대 병원에서 잃었습니다.
너무 마음의 상처가 커서...
하늘의 구름만 보아도 쪼꼬 같고,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서 하루는 버리고,
다음날은 다시 가서 찾아오고...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데도...
하얀 개만 보면 끌어안고
울다가 미친놈 취급받은적도 있었습니다.
쪼꼬가 물어 뜯어 망가뜨려서
버리려고 모아 두었던 색연필도
다시 꺼내서 연필꽂이에 꽂아놓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느라
회사에 연락도 없이 결근을 해 버렸습니다.
쪼꼬를 보내고 일주일째 되던날...
9월초 오후...
아직 푹푹찌는 옥탑방 침대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토록 보고싶던 쪼꼬를 보았습니다.
쪼꼬보다 덩치가 많이 작았지만,
틀림없는 쪼꼬였습니다.
화장실쪽에서 나와서는
(쪼꼬가 화장실을 사용했으므로 화장실문은 항상 열어 두었었습니다)
침대에 뛰어 올라 내게 한참동안을 안겨 있다가...
다시 화장실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꿈이 너무도 생생해서...
깨어나서도 현실과 꿈을 분간하지 못하고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어가서
쪼꼬의 이름을 부르면서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회사에서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기록된 핸드폰 생각이 났습니다.
대충 씻고 회사에 오후 늦게나 되어서야
일단 출근을 했습니다.
난 사장으로부터 퇴사를 종용 받을 줄 알았는데...
회사에 불만이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았는지...
연봉도 세 배로 높게 책정되어 있었고,
작품 총감독으로 내정되어 있더군요.
쪼꼬...
죽어서까지 나를 챙겨 주었던가 봅니다.
서울대 수의대 병원측에서 희귀한 병이라 연구하고 싶다해서
기증을 했기 때문에 쪼꼬는 내가 묻어 주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이 정말 오랫동안 한으로 남더군요.
연구가 끝나면 애기들끼리 모아서
이쁘게 화장해 준다고는 했지만,
혹시 쓰레기장에 버린건 아닌지...
어쨋든 포토샵은 내게 재생과 부활의 의미가 있는
정말 너무나 소중한 의미로 남게 되었습니다.
저 하늘 어딘가에서 구름속을 산책하고 있을
내 사랑하는 아이 쪼꼬와 함께...
감사합니다
Joo Hee(주희) - 恋人/Koibito(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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