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주고 간 소녀/블루 탁이
항상 별 다를 것 없이 그렇게 해 온 일이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이 순간이 오면
일종의 허탈감이 밀려들곤 합니다.
비교적 스스로 만족할만한 일을 밤새 해낸 것 같기는 하지만....
일을 마치게 되면 뚜렷한 뭔가를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다해도
소풍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어
뜬눈으로 하얗게 지새운 밤이었는데...
결국, 또 그렇게 하루를 보냈을 뿐이구나......
블로그에 들어오면서 내 블로그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그리움보다 낯선 사랑"
2006년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이 걸려있는 저 현수막 같은 블로그의 이름...
그렇다면 블로그를 만들기 이전에도 "그리움"이란 낱말을 자주
사용 해왔다는 얘기인데...
사실,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한 번 이어폰을 끼고 엎드리면
푸샾을 1000번이나 거뜬히 해 내는 오십 대 초반의 괴물이
저런 감성적인 문패를 십 년 가까이 걸고 있었다니....
하지만, 나를 괴물로 키운 것은 그리움일지도
모른다는 책임회피식 타협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곳을 흔적 없이 다녀 갈지도 모르는
내 첫사랑...
최소한 나와 학창 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나의 첫사랑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녀 또한 이 나이 먹도록 그렇게 믿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 아닙니다.
어쨌든 그녀는 초등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여섯 곳의 학생들이 외지로 가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다녀야 했던 중학교에서도
최고의 미인으로 꼽혔던 여학생이었고
그녀와 나는 3년 동안을 한 버스 정류장에서
새벽 등교를 위해 여명이 밝아 오기 전부터
한 곳만을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렸던 친구였으니까요
캄캄한 고개 밑 삼거리.....
서로가 바라보기가 민망해서
버스가 오는 방향만 말없이 바라보다가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새벽빛에 발갛게 달아오른 볼.... 아직도 생각납니다.
그녀가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놀러 왔던 곳도 우리 집이었고,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을 지칭하는 몇 가지 대명사가 있었는데
그건, 빨간 기와집이었고, 앵두나무집이었습니다.
간혹 먼 친척들이 찾아올 때
순박한 시골 인심에 "공부 잘하는 애들 사는 집"이 어디냐고 묻기도 했다더군요.
공부를 잘하고 예능 쪽에 재주가 많았던 누나들 덕뿐에
나 역시 징그럽게 못난 이었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주목을 받았던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나의 첫사랑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만이 알고 있습니다.
나의 첫사랑은...
이미 일곱 살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어린 감정의 시작이 안개 너머의 그리움을 찾아
일생을 허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우리 마을의 지명은 참으로 독특해요,
아니 독특하기보다는 우스워요.
일단 우리 집이 있는 골짜기는 이름이 "행 팽이 골"입니다.
행 팽이 골에서 좌로 돌아 언덕배기 밑에 보이는 골짜기는
"이팍골"이었고 그 옆은 쑥 박골,
거기서 한 고개 넘어가면 "여우골"
그리고, 우리 집 앞은 효복이네가 살고 있는 발 궐 골,
그밖에 잼 말, 수군터,부터지, 대호지, 지망 구지, 용수말, 절골, 청룡재, 안골,.....
더 많은데 생각이 안 나네요
어쨌든 산 밑에 집들은 한 집당 하나의 마을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낮의 파란 하늘엔 저 멀리 닭을 노리는 매가
바람에 날개를 식히며 날고 있었고
계절마다 산속에 열리는 과일을 귀신같이 알고
보리수, 산앵두, 머루, 다래.....
철마다 따먹으며
적막하지만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던
허약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서산이"라고 불리는 점쟁이가
열 살을 넘기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운명이라고 예언했던 게 나였다네요^^
그런 이유로, 어린 시절 내 몸에는 부적과 오색실이 끊어질 날이 없었고
물에 가면 익사한다, 산에 가면 낙상을 당한다
귀하게 얻은 아들이었기에 난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소일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그 점쟁이의 예언에 박자라도 맞추듯이
나는 몸을 조금만 무리하게 사용하거나 조금만 신나게 뛰어놀아도
그날 밤은 어김없이 경기(끼)를 하였고
온 집안 식구에 친척까지 와서
내가 깨어날 때까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내려다보곤 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요
희미한 사람들이 내려다보던 얼굴들....
큰 할머니, 안골 할머니.... 엄마... 아버지.... 그리고 누나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되었고
사소한 심부름마저 시키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그걸 당연시 받아들였고,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농번기가 오면
내 어린 동생들마저 들로 나가 밭매는 엄마와
할머니의 근처에 얼씬거리면서 잡일을 도왔지만
난 항상 마당의 떡갈나무 밑에서 혼자 놀거나
어느 순간 탈진할 정도로 지겨워지면
집 모퉁이를 돌아 칡넝쿨이 길을 막는 오솔길을 넘어
이팍골로 놀러 가곤 했습니다.
그곳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한 채 있었고
그곳에 조금 못 미쳐 마당처럼 넓은 공터에
몇 년이 된지도 모를 만큼의 늙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곳도 집터였습니다.
감나무 밑 공터 주변에는 깨어진 항아리 조각과 흙벽돌이
아직 형체를 유지한 채 굴러 다니고 있었으니까요.
그곳엔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모를
밀집으로 짠 멍석이 하나 깔려 있었는데
난 그곳에서 낮잠도 자고
나비나 벌을 쫓기도 하면서 기나긴 하루하루를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난, 그때부터 이미 고독이란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괴기스럽게 길 한복판을 막고 있는
칡넝쿨을 한줄기 잘라서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내가 항상 가는 그 자리
감나무 밑 멍석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멀지 않은 빈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까
애들 목소리도 간간히 흘러나오더군요.
나중에 알았지만,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갈곳 없이 떠돌다가 이장님의 허락을 받고
그 집에 이사 오게 된 가족이었다네요.
하지만, 속내는 빚에 쫓겨 숨어 다니는 사람들이었대요.
인적 없이 고요했던 곳,
귀신이라도 나올까 봐 가보지도 못했던 빈집
그곳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니......
항상 혼자일 수밖에 없는 난 그 사실이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이제부터는 빈집에서 나올지도 모를 귀신 걱정 없이
감나무 밑에서 잠을 잘 수가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한참을 쳐다보고 있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고 별다른 변화를 못 느끼자
난 그것도 금방 시들해져서 이마의 솜털을 헤치며 산들거리는 바람을 베개 삼아
곧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잠들어 있었는지.....
눈을 떠보니 땅거미가 아랫마을부터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더 늦으면 가뜩이나 겁이 많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비교적 큰길로 이어진 아랫동네를 거쳐 윗마을 한 바퀴 돌아
집에 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길은 어린 내게는 너무 먼 거리였고 별로
시도해 보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서둘러 고무신을 찾아 신고 막 달려가려는데...
"야! 넌 누군데 하루 종일 잠만 자니?"
갑자기 창졸지간에 당한 일에 간이 콩알만 해져서
콩당 거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누르며
돌아선 그 순간....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 되었습니다.
시골에서는 본 적이 없는 하얀 얼굴
양갈래 머리 곱게 따 내리고....
가늘고 흰 팔다리...
나보다 훨씬 커다란 키에 하얀색 원피스...
면서기 딸과 얼마 전에 아버지를 따라 전학 왔다는
마을 지서 순경 딸을 제외하곤
여자 아이들이 원피스를 입어 본 적이 없다는
두메산골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놀랐던 건
그녀가 쓴 안경이었습니다.
붉은색이 감도는 보라 테 안경...
눈이 나쁜 사람이 없어서 안경을 안 쓰고 있는 건 아니었겠지만
우리 마을에는 눈 가진 사람들이 딱 두 종류밖에 없었습니다.
맹인과 안경 안 쓴 사람들.......
병색이 짙은 얼굴로 토끼눈이 되어있는 나에게
다시 입모양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내게 들려왔습니다.
"얘! 너 혹시 빨간 기와집 아줌마네가 어딘지 아니?"
"웅.... 아러... 왜?"
"엄마가 떡 갖다 주래서 그래... 알긴 아는 거야?"
"웅... 으응... 나, 나.... 그 집 살아...."
"잘 됐다 같이 가자..."
칡덩굴이 어지럽게 기어 다니는 그 길을 따라 같이 걸으며
나는 그녀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나보다 두 살이 많은
누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그녀의 이름은 은경이었고
아빠와 함께 서울에 남아 있는 언니의 이름이 은주란 사실
(사실, 지금도 성씨는 모릅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아빠의 일이 잘 해결되면
곧 다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될 거란 사실까지도...
그날 이후로
난 항상 그 감나무 밑에서 그녀를 기다렸습니다.
혹시나 내가 잘 때 그 길을 지나칠까 봐
잠도 억지로 참으면서
그녀는 내 기다림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항상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면
길이 만나는 점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고
언제나
그 감나무 밑에 빨간 가방을 던져놓고
나와 놀아 주었습니다.
지금 돌아보아도
내 살아온 인생을 통 털어 그 시절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나쁜 어린 나에게도
느낌이라는 것은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그녀네가 마을을 떠나게 된다는 것을....
짐이 그리 많지 않았던 은경이네 마당에
삼륜차가 와 있던 날
난 울지는 않았지만
울음을 참을 때의 내 얼굴 모습을 알고는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표현 사용하기 싫지만
가장 적합한 표현일듯해서 적습니다.
어렸을 적 내가 울듯 말 듯 할 때는
꼭 뇌성마비 환자와 비슷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 입꼬리 밑에 희미한 볼우물.....
얼굴이 좌우대칭이 달라집니다.
고모가 찍은 사진 중에 그런 사진이 있어서 너무 잘 알아요.
그 애는 신이 났는지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삼륜차 주위를 깸 깸이 발로 왔다 갔다 하며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그 은주란 언니와 방글거리느라 정신없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
감나무 밑에서 굳은 듯이 서있는 나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요
눈이 마주친 순간
하던 장난을 멈추고 내쪽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어요.
"우리 집 이제 서울로 이사가" 알고 있지?
난 대답 대신 고개만 끄떡였습니다.
내 표정을 이리저리 얼굴 짓으로 갸우뚱거리며 훑어보던 은경이가
나를 위안하려는 듯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나... 꼭 너 보러 놀러 올게....
"아빠도 이 마을에 신세 진 분들이 많다고
꼭 다시 찾아온댔어
그때 아빠와 함께 올게"
"그게 언젠데?"
그러자 그녀가
물끄러미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해는 유난히 벼멸구가 극성을 부려서
마을 4H 청년들이 면 전체에 농약을 살포하는 날이었습니다.
평년보다 몇 배는 더 독한 농약을 사용한다는
어른들의 대화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농약이 대대적으로 살포되기 시작하자
논에 있던 모든 나방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 나방을 새끼에게 물어다 주기 위해
마을의 집집 처마에다 집을 지은
제비들이 새카맣게 떠서 어지럽게 날고 있었습니다.
"응! 저 제비가 다시 올 때쯤에...."
난 정말 머리가 나빴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어요.
그다음 해....
항상 봄이 오면 쌍쌍이 찾아와서
대청 처마 밑에 집을 짓던 제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뿐만 아니고 마을 전체가 그랬습니다.
가끔 배 밑이 불그스름한 산제비들만 몇 마리
비상하는 것이 눈에 뜨일 뿐......
그 농약....
그 농약을 먹은 새끼들이 다 죽었거나....
먹이 사슬이 사라진 마을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날아간 것이었겠죠.
제비도 오지 않았지만
그 감나무 밑에 찾아오기로 했던 그녀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해 봄....
나는 많이 아팠습니다.
초등학교를 입학은 했지만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아팠습니다.
가끔 처마 밑을 보며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물었습니다.
다 큰 놈이 왜 까닭 없이 우냐고....
난... 제비가 오지 않아서 운다고 대답했고
엄마는 그런 나를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했는지
음암에서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을 사흘이나 했습니다.
집 근처 곳곳에 팥죽이 뿌려지고
나무둥치에는 부엌칼이 꽂히고
외양간에는 시루떡 접시가....
집안에 향냄새와 양초 타는 냄새가 채 가시기 도전의 어느 날
나는 그 감나무가 있는 공터를 향해 미친 듯이 질주했고
갑자기 몸을 사용하는 바람에
좀 전에 먹은 삶은 고구마를 다 토했지만
속이 후련해지는 걸 느꼈고
난 그때마다 답답하면
마을 야산을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남들은 고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시지만
난 지금도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운동을 합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니고 나서
농약에 내성이 생겼는지
제비들이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가끔씩 마을에 찾아오는 봄이 왔지만
그녀는 끝내 오지 않았어요.
사실 난 그녀의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썼던 붉은색이 감돌던 보라색 뿔테 안경......
지금 돌아보면 이미 사십여 년 전의 일인데....
난 아직도 그때의 그리움을 연장하며
살아온 것 같단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워해 본 사람은 압니다.
그리움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증오보다도
막연한 그리움이 몇 배 더 사람의 마음을 옥죄어 오는 것인지를.....
유년기에 겪었던 그 아픈 그리움의 영향이었을까요.
살아오면서 난 그리움을 주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 거 같긴 해요
어차피 책임지지 못할 그리움이라면
차라리 미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그리움에 너무나 아파했던 나의 모습이 아직도
거울처럼 나를 마주 보며 다가오니까요.
이제 그녀도.
지금쯤은...
늘어만 가는 흰머리 때문에
여염집 아낙네들처럼 염색약에 새치 약 고르면서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겠지요.
지금의 나처럼.......
너무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어디선가 마주친다 해도
서로가 알아볼 수도 없는 그리움의 끝...
유년기의 그 고독했던 기다림과 그리움은
비망록의 첫 페이지로만 남아 있게 될 것을.....
☆☆☆☆☆☆☆☆☆그리움을 주고 간 소녀..... 후기☆☆☆☆☆☆☆☆☆
제가 올린 글이긴 하지만 덧글을 꼭 추가하고 싶었기에 달아봅니다.
...................................................................................
가능한 선에서 텍스트 양을 줄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었기 때문에
표현하고 싶은 부분마저 생략한 경우가 많아요.
은경이하고 감나무 밑에서 약 삼 개월 반 동안의 놀이 부분에 대한
묘사가 빠졌기에 다시 읽어 볼 때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1. 받아쓰기
은경이는 아직 저학년이라서 점심시간을 전후해서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항상 그곳에 나타났는데.
주로 했던 놀이는 받아 쓰기였습니다.
밀집 멍석 위라서 책받침을 꼭 노트에 대고 연필심에 침을 꼭꼭 바르면서
정성껏 받아쓰기를 했었는데
어떤 날은 내가 써야 할 범위를 정해주고 옆에서 인형 놀이를 하거나
나뭇가지와 가지 사이에 고무줄을 매어놓고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날 관리 감독했습니다.
글씨에 대한 기본은 바로 손위 누나한테 배웠기 때문에
읽기, 쓰기를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았지만,
원래 어려서부터 손재주는 조금 있었는지... 꽤 잘 쓰는 편이었습니다
(솔직히 은경이보다는 잘 썼죠)
거의 다 마쳐 갈 때쯤이면 그녀 특유의 동작 고개를 쭉 빼고 빼꼼히 내려다보는.....
그러다 맘에 들면
이마나 볼에 뽀뽀를 해주면서 하던 말이 있었는데....
"우리 자기 글씨 이쁘게 썼으니까 내가 뽀 해줄게~~"
난 자기란 말을 첨 들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어요
우리 동네에서는 한쪽 날이 있는 망치를 자기라고 했거든요.
어떤 날은 입술에도 뽀를 해주었는데....
어디서 배운 적도 없었을 텐데 서로의 혀가 입속으로 침노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은경이가 고개를 다시 쭉 내밀어 사방을 한 번 두리번 그린 다음
"우리 자기 오늘은 특별히 글씨를 더 잘 썼으니까...."
"내 치마에 손 넣게 해 줄게~~~"
난 무섭기도 하고 기분도 이상해서 손을 멈칫거리며 자꾸 빼니까
(일곱 살짜리가 그 좋은 걸 알았겠습니까?.....)
"왜 그러는 데에~~~?(시골 아줌마의 말투를 흉내며 약간 높은 톤으로)
난 무섭다고는 못하고
"그냥... 오줌 냄새날까 봐 싫어!" 했더니
"뭐 시 여~~~~!!(눈썹을 치켜뜨며 큰 목소리로)
"술이 원수여~~~~~!! 원수.... 그러니까 술좀 작작 푸랬찌?"
아이고~~~ 내가 못살아 못살아~~~
(아무래도 은경이네 부모님은 이렇게 싸우셨을 듯.....;;)
그래도 가끔 은경이와 나란히 누워서 눈썹을 간지럽히는 바람 너머로
뻥 뚫린 파아란 하늘을 바라볼 때면.......... 정말.... 정말....
(성인이 되어서도 그곳에 가서 누워 봤어요. 감나무는 밑동만 남겨진 채 베어진지
오래였고 인적 끊긴 마당에는 잡초가 자랐을 때지만...)
2.비 오는 날
난 비오는 날이 좋았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감나무 잎사귀를 우산 삼아 기다리다 보면
은경이네 엄마가 같이 집에 불러들였어요.
빚쟁이들을 의식해서인지 외부인에게 노출을 꺼렸으므로
평소에는 집에 놀러 가는 걸 싫어했지만.
비 오는 날만큼은 은경이와 함께 불러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걸 한 잔씩 주었었는데
훨씬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게 바로 요즘 즐겨먹는 커피였습니다.
결국, 난 은경이를 통해서 첫 키스, 여자가 남자와 다르게 생긴 것....
부부싸움..... 이 모든 걸
그 감나무 밑에서 모두 마스터한 셈이에요.
내가 그녀를 그리워했던 게 이상한 건가요?
첫사랑을 만나게 되면 후회하게 된다고들 하지만....
그녀가 앉은뱅이가 되어 있다 해도...
한 번쯤은.... 죽기 전에 꼭꼭 다시 보고 싶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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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뭐든 다 아름답습니다.
헤어지면 아픈 추억이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가슴 저며오는 그리움이고
죽으면 수호천사 되어 날 지켜주고
유학 가면 사랑의 관록이요, 늙어서도 보고 싶은 것이 첫사랑,
다시 만나게 되면 설렘입니다.....
하지만,
부부는......?
한국의 돌싱들이 가장 싫어하는 낱말이 전처와 전남편이라고 합니다.
2년 전쯤에 비교적 친한 친구 한 명이 회식 때 슬그머니 빠지더군요
왜 그냥 가냐고 물었더니
장모님이 어제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뭘 걱정해? 넌 퇴역 사위고, 그쪽에 현직 사위 있잖아?" 했더니
"나도 애들 엄마는 꼴도 보기 싫지만...... 애한테는 외할머니라서.....
그냥 애라도 보낼까...." 하면서 한숨을 쉬더군요.
당사자가 죽거나 다치거나 했을 때는 더 하겠지요
내 전남편이 다쳐서, 죽어서....
내 전부인이 죽어서.....
아무리 당당해도 사람들에게 말하기가 힘든 고충이 있겠지요.
이것이 첫사랑(가상현실)과 부부(현실)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요.
결국,
결혼하신 분들....
나처럼 알콩달콩 잘 사는 방법 말고는 그 어떤 아름다운 미사여구도
사용하기 힘든 게 나머지의 모든 것들입니다.
첫사랑도 좋지만,
지금 곁에 있는 사람.... 조금만 더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사랑해주세요.
-7월 19일 후기 덧붙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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