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보다 낯선 사랑/♧나의 인생 메모

돌파구도 대안도 없었다.

Blue 탁이 2014. 6. 3. 02:43

Chyi Yu - You Can't Say



 

나의 인생에서 스무살은 너무나 힘든 시기였고

삭막한 사막보다 더 황폐한 하루하루로 기억되어진다.

일단 입대해야한다는 부담을 가슴에서 떨군 날이 없었고

수중에는 항상 돈이 없었다.

 

좀더 나은 대학을 가보겠다는 분수에 넘치는 욕구가

나를 학원가와 독서실로 몰았었고

나는 학생부 쿵푸 사범 몇 타임을 맡아서 받는 월급 6만원이 전부였었다.

그 힘든 시기에서도 사랑은 찾아왔었고

난 젊은 혈기답게 항상 왕성한 집착을 보였었지만

그나마 그녀가 나를 받아 주었다.

 

그후 몇 개월동안 데이트 코스라고 해봤자 신설동과 동대문 사이에 있는

음악 심야 다방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음악다방의 이름은 "둘반다방,금성다방,샘다방"이다)

함께 밤을 지새우는것이 가장 사치스러운것이었는데......

난 그래도 행복했고 그녀 또한 그런 줄만 알았었다.

 

하지만,

난 어느날 보고 말았다.

그녀를 알고부터는 아름다운 연예인의 기준조차

흐려질만큼 모든 미의 기준이 그녀였고

내게 더이상의 이성에 대한 환상이나 이상은 없었다.

 

그 당시에 최고급 승용차에 속했던 로얄 레코드에서

부축을 받으며 한손을 그의 팔에 걸치고 내리는 그녀를 보았다.

 

애써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며

스스로 그녀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도 보았지만

그 시간때가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보아서는 안되었던것 같다.

4층 독서실 옥상에서도 가로등밑에서 작별의 키스를 하는 모습은

지나치리만큼 선명하게 줌업이 되어 나의 가슴을 강타해왔다.

 

난 가진게 없었고,젊음 하나만 살아서 꿈틀대는 그런 시기였기에

상심과 좌절이 더 컸었던것 같다.

 

게다가 입영이란 부담이 늘 그녀를 생각할때마다

가슴에 맺힌 돌처럼 나를 짓눌러 오곤 했었는데.....

 

말다툼할 기회도 없이 그녀는 떠나 버렸고

얼마후에 학원가에서도 종적을 감추었다.

 

그때부터 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독서실 책상에 엎드려 잠이 아닌 잠을 자며 하루를 소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정도의 복장을 갖춰입고 숭인동 독서실 출구를 나서는 내 모습을

남의 모습처럼 느끼면서 정신없이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닿은곳이 보문사의 담장이 보이는 곳이었다.

가끔 새벽 조깅을 할 때 지나치긴 했지만

비구니들만 있는곳이라서 그런지 선뜻 발길을 하지 못한곳이었다.

 

연등이 보이기 시작하는것을 보니 초파일이 다가오고 있었나보다.

정신없이 절간을 이리저리 배회하다보니

석굴암을 본떠 만든 석불존이 가장 깊숙이에 자리하고 있었고

난 그곳 바위 어딘가를 골라잡아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그때 가까운곳에서 들려오는 낭낭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직 애띤 모습이 남아있는 비구니였는데

항상 경을 읽어서 그런지

맑은 음색속에서도 은은히 남자의 기백이 흘러나오는 그런 말투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비구니의 법명은 "정인"스님이었다.

 

정인 스님의 말이 다시 한 번 들렸다.

 

"시주! 시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의 근심 걱정을 모두 지고 있는것 같소?"

 

나는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듯이 정인 스님과 대화를 시작했는데

자초지종을 듣고 난 정인 스님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혼쾌하게 결말을 내려 주었다.

 

"시주님!

의식적으로 피하려 들지 마세요

곁눈질로 보는 세상이 더 참기 힘들다오

 

피하지 말고 따라 다니면서 그녀의 비행을 직접보고 느끼고

받아 들여 보세요

 

그러다 보면 그녀의 밝은 모습에만 취해 있던 시주의 생각과 의식이 달라질 것이오"

 

그러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건 수행자에게나 가능한 것이었다.

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낱 범부였던 내게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차라리 안보고  안듣고 안느끼고......그녀를 느낄 수 있는 모든것들을 없애는것이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최선책이랄 수 있었던것 같다.

 

같은해 9월 22일....추석 다음날에 나는 해병대에 자원 입대해서

진해로 향하는 입영열차(영화에서 나오는 건 사기고, 두 칸 정도 무료 승차칸이 있을뿐)

에 올랐다.

 

 

 

 

 

.............................................................

 

 

바로 그거였던것 같다.

기억을 지우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뇌수술을 받아서 지우는 방법이 있다면 모를까

 

뇌리에 각인된 기억들은 가슴으로 타고 내려와

끊임없이 뿌리를 내려 고통을 주곤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미묘한 감정 때문에 돌파구가 없을 땐

떠나는 방법이 어쩌면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떠났었지....그랬었지.....

아무리 이성으로 막아 보려해도

몇 번씩 정신을 모질게 다잡고 다짐하며 부정해 보아도

이끌려가는 마음을 묶어 역주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고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를 위해

떠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나 아닌 누군가가 또 떠나갈 일이 생긴다면

나와 같은 처지였거나 사랑을 얻지 못한 경우겠지.....

 

 

난 오늘 가지 말아야 할곳을 갔었다.

확인해볼 필요가 있는 뭔가를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이라도 느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는 너무 많은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었고

너무 오랜 세월동안 얽힌 사슬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알아보는 건 내사랑만이 아니라 기억에서 지워야 할 인간들도

너무 쉽게 알아보고 있었다.

 

 

이젠 조금 알것 같다.

왜 밤하늘의 별이

수 많은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남아 있는지 .....

어떤 경우는 멀리 있어야만 지켜 줄 수 있는것이 있다.

 

그리고, 또 이제 한 가지를 더 알것 같다.

번지점프에서...

왜 줄없이 점프를 해야 했는지.....

 

그리고,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왜 프랜체스카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떠나간 캔케이트가 죽기전에 단 한번도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는지....

 

그당시에는

그냥 가슴이 저미는 안타까움 하나였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선택을 알것만 같다.

 

난 너무 멀리 왔고, 너무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