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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에게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는 이유ㅣ별(알리)이 지다ㅣ알리의 환상적인 스텝과 스피드 영상...

Blue 탁이 2016. 6. 10. 15:02

인류 역사상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The Greatest of All Mohammed Ali



미국 복싱의 전설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가 향년 74세로 사망했다.
 
4일 AP 통신 등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알리는 생명보조 장치에 의존해
병상에서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은퇴 3년 만인 1984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30여년간 투병했던 알리는
사망 전날 호흡기 질환으로 애리조나 주 피닉스 시에 위치한 한 병원에 입원했다.
 
알리는 최근 수년간 수차례 병원신세를 졌으며 2014년에는 폐렴으로,
지난해에는 요로 감염으로 입원한 바 있다.
 
1942년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태어난 알리는
12살 때부터 복싱을 시작했으며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프로로 전향해 3차례에 걸쳐 헤비급 타이틀을 거머쥔 알리는
통산 19차례 방어에 성공하며
1960~70년대를 풍미한 '전설의 복서'로 평가받았다.


4전 5기의 위대한 한국 복싱계의 신화  '홍수환'이 말하는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사람들은 왜 알리에게 박수를 보내는가...

미국의 전 복서 무하마드 알리는 통산전적 "61전 56승 5패 37KO승"
이라는 불세출의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라이트헤비급 복싱 금메달딴 후
프로에 입문하여 세 차례나 세계헤비급 챔피언올랐다.

1960년대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전 세계적이었다.
예수보다 더 유명했다던 비틀즈의 인기를 뛰어넘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전성기 시절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그의 경기 모습은 예술의 차원에서 논해야 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도 그는 특히 미국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다.
작가 노먼 매일러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천재는
채플린과 알리'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 자주 볼 수 없지만,
가끔 행사장에 비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저명인사들로 가득 찬 행사장에서
사회자가 한 사람을 소개하는 순간이 TV로 중계된다.


'무하마드 알리'


카메라는 즉시 2층 객석 맨 앞자리에 앉은 알리를 비추고,
파킨슨 병으로 몸이 불편한 알리는
천천히 일어나 손을 흔든다.
1층 객석에 앉은 저명인사들은 모두 몸을 돌려
2층에 있는 알리에게 존경의 기립박수를 보낸다.
이것이 이즈막에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알리의 모습이다.

사실 30년 전만 해도 미국인들은 알리를 두려워했고, 혐오했다.
인종차별에 울분을 느껴 올림픽 금메달을 미시시피 강에 던져버리고
'떠버리 알리'로 이름을 날리며 세계챔피언이 된 흑인 복서.
노예의 이름인 '캐시어스 클레이'를 내던지고 흑인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이름
'무하마드 알리'를 선택한 흑인의 영웅.

자신을 '알리'가 아니라 '클레이'라고 부르는 상대 선수를 넉다운 시킨 후
"내 이름을 다시 말해봐!" 라고 외친 챔피언.

그것이 젊은 날의 무하마드 알리였다.


그리고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한다. 그 이유가 명쾌했다.

"베트남사람들은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총을 들이댈 이유가 없다."

징병거부는 불량한 것으로 여겨지고 죄악시되던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알리의 징병거부는 반전운동의 불씨가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리는 영화, 음악, 스포츠계를 망라하여
징병반대와 반전의 기치를 내걸었던 유일한 대중인사였다.

반전의 상징적 존재가 된 알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FBI의 주요 감찰 대상이었다.
그는 결국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 당하고
이후 3년 6개월 간 링에 오르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1974년 32살의 나이로 챔피언 타이틀을 재탈환하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1981년 은퇴선언을 한 알리는 파킨슨  병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중에도
꾸준히 자선행사를 다니고 봉사활동을 한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떨리는 몸짓으로 성화를 점화해 세계인을 감동 시켰고,
IOC는 알리에게 금메달을 다시 만들어 수여했다.

젊은날 알리의 삶은 백인사회에 대한 조롱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알리는 백인들에게 불편한 존재였고 골칫덩어리였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오늘날 보내는 백인들의 박수는 어쩌면
다분히 정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정의로운 미국사회, 인종차별 없는 미국사회를
증명하기 위해서 라도

백인들은 그에게 열심히 박수를 보내댜 할 테니까.

(유튜브 영상'의 나레이션을 옮겨 적음)

알리. 당신은 영원한 챔피언입니다. Good Bye Ali.. [무하마드 알리 일대기]








세기의 대결▶무패의 조지 포먼 VS 복싱 전설 무하마드 알리  


특별히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치 않았던 시대에 프로 레스링과 세계 헤비급 복싱 경기는 쑥박골 친구 누나가

시집 갈 때 과방에서

쏟아지는 먹거리를 기다리는 소년의 기다림 이상의 대단한 잔치날과도 같았습니다.


동네에 TV라고는 월남전에 참전 했다가 사 온 흑백 TV가 잼말 큰댁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학교앞 가게집과

우리집 그리고 윗말 반장댁과 차부집이 거의 유일했는데...


우리집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자동차 밧데리를 충전한 충전기로 TV와 백열등을 겨우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외딴집 (빨간 기와집,앵두나무 집으로도 불림)이었던

우리집에서 전기를 끌어오기위해선

그 당시 돈으로 전봇대 하나당 5만원이 추가 되었는데 ...총 여섯개의 전봇대를 세워야만 했다더군요.


남들한테 지기 싫어하는 아버님께서는 그 이듬해에 기어이 큰 돈을 주고 전기를 끌어 오셨습니다

몇 년이 흐른후 이웃동네에도 전기가 들어 갔기 때문에 그 선에서 끌어 왔다면 싸게 할 수도 있었는데...

어쨋든 그런 사연을 안고 비교적 문화적 혜택?을 몇 년정도 동네 아이들보다 빨리 누리게 되었는데...


그 시절에 '알리'가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알리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 시간때에 해당하는 수업 시간을 담임 선생님께서 자유 시간으로 해 주시고

어디든 가서 알리'의 경기를 보고 오라고 배려?를 해 주셨을 정도입니다.


친한 친구 몇 명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집의 17인치 흑백 TV를 보기위해 땡볕을 받으며 뛰어가서

경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경기가 아마도 챔피온 알리와 도전자 위푸너'의 경기였던것으로 확실히 기억합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15라운드 중 13라운드를 내내 방어만 하면서 잔펀치를 허용하고 코너에 몰렸던 알리가

14라운드 중반이 되자 반격을 시작하면서 현란한 스텝이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15라운드에 강펀지로 일격을 날려서 KO시키는 반전의 짜릿함...


어린날의 영웅...가슴이 뜨거워지는 열정과 등골에 전해지는 쭈뼛함을 전해 주었던 알리...

그 뚜렷한 추억속에 전설의 별로 빛나는 알리는 지금도 내 가슴속에 찬란한 별이 되어 반짝입니다.


살아서도 전설이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전설이 된 고 '무하마드 알리'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무하마드 알리'가 남긴 명언과 사진 뷰(네이버 이미지 펌)









































 무하마드 알리'에 버금 가리만치 강력한 헤비급 챔피온 마이크 타이슨'을 다룬 포스팅을 전에 올렸습니다만,

정말 좋아하는 복서 알리'의 포스팅을 뒤늦게 준비한 이유가...

죽음을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낭설이나 허구로 들리시겠지요?


하지만,

어쨋든 기분이겠지만,이상하게도 마이크 타이슨'의 포스팅을 준비하던 날에

무하마드 알리'도 같이 검색해보고 준비도 해 놓았지만,

왠지.......죽음이 임박한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전에도 그런적이 꽤 있긴 했는데...그건 주위 사람들이었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예지 능력이 있다는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정말 우연히 사람들이 죽기전에 영감을 받은적이 많습니다.


어쨋든, 천부적으로 타고난 알리의 두뇌와 주먹...그리고 그가 남긴 크고 작은 이슈들...

이 포스팅과 함께 다시 한번 되짚어 보시기 바래요.


감사합니다.